



담영
淡榮
담담한 | 욕심이 없는 | 초탈한 | 현세주의 | 즉흥적인
행동력 있는 | 둔한 | 세상물정에 어두운
담담한, 욕심이 없는, 초탈한
빛이 잘 들지 않는 회색의 눈동자에 무엇이 맺히든 크게 흔들리는 법이 없다. 예외가 있다면 어린 아이 정도일까. 그럴 때면 반쯤 감긴 눈이 가볍게 접히기도 하지만 두어번 밟힌 눈처럼 어딘가 탁하고 냉랭한 홍채가 크게 동요하는 것을 보이는 일은 드물었다. 그것은 무심하기 때문이라기보단 어딘가 내려놓은 것 같은 초탈함 때문이라고 보는 게 맞았다.
마음에 품는 것이 없으니 아무것도 욕망하지 않고, 바라지 않으니 슬퍼하거나 기뻐하지도 않는다. 물론 일상의 기쁨이나 슬픔을 느끼지 못하는 건 아니었지만 딱 그 정도의 욕심뿐이다. 인간이 느낄 수 있는 최소한의 감각을 유지하며 살아있는 것 같다는 게 주변인들의 평가. 덕분에 대하기 편하다는 장점은 있으나 그런 그를 답답해 하는 사람도 더러 있는 모양이다.
현세주의, 즉흥적인, 행동력 있는
두번 고민하지도 않고 고개를 끄덕이는 탓에 되려 부탁한 이들이 “정말로?” 하고 묻는 일이 일상 다반사다. 그의 기준은 ‘지금 현재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인가?’이며 이 물음에 ‘예.’라고 답할 수 있는 것은 대체적으로 다 들어주는 편이다.
그러나 헌신적이거나 천성이 착해서라고 보기에는 모호한 구석이 종종 보인다. 헌신적이라고 하기엔 어떠한 열정이나 따스함이 느껴지지 않고, 천성이 착하다기엔 부탁한 것이 어떤 것인지를 크게 따지지 않는다. 어째서 타인의 부탁을 들어주느냐 물으면 웃기만 할 뿐 답이 돌아오진 않는다. 그저 속이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것이 일반적인 의견이다.
둔한, 세상물정에 어두운
그는 수를 셀 줄 모르는 아이보다 더 제 손실과 이익을 잘 따지지 못한다. 잃어도 얻어도 그를 크게 여기지 않기 때문에 둔한 것인지 혹은 둔해서 잃고 얻는 것에 무심한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래도 최근에는 주변인들의 도움으로 겨우 스스로가 타인에 비해 둔하다는 것만 겨우 알아차린 상태.
세상 물정에 어두운 탓에 물건을 합리적으로 구매하는 일에 몹시 서툴다. 사람에게 원하는 반응을 이끌어내는 일 또한 그에게는 몹시 어려운 일이다. 어떻게 장성한 성인의 몸으로 이렇게 현실 감각이 떨어질 수 있는가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이 험난한 시대에 살아있는가는 그를 아는 모든 이들의 공통된 의문점이다.
: 절름발이. 5살쯤 동네 언덕에서 굴러 떨어져 오른쪽 발목을 크게 다쳤다. 다행히 큰 탈은 없었으나 사고 당시에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않았기에 그 후유증으로 발목 한쪽이 바깥 쪽으로 45도정도 돌아가 있다. 거동에는 약간의 불편함이 있지만 혼자서 움직일 수는 있는 정도. 대신 남들보다 속도가 훨씬 느리며 지팡이를 이용해야 한다. 오래 걸으면 발목에 무리가 되기에 중간중간 쉬어가야 하며, 궂은 날에는 발목이 욱신거리기도 한다.
: 왈패단에서는 직접 거리를 누비는 일 보다는 곳간에 남아 내부를 정비하고 소일거리를 받아다 하는 편이다. 주로 어린 아이들이 담영의 발이 되어주어 일을 받아와 바깥으로 나가지 않고도 안에서 머무를 수 있다. 그렇게 번 돈은 한 푼도 빠짐없이 식재료나 아이들에게 줄 간식 같은 것을 사는데 쓰여 일은 꾸준히 해도 언제나 동전주머니가 가볍다.
: 동네 이름을 말해도 10명 중 10명이 모르는 촌에서 왔다. 지도에도 적혀있지 않아 수도로 올라오는데 제 위치를 가늠하기 어려워 애를 먹었다. 그의 설명으로는 남쪽에 있는 수도보다 따듯한 마을이며 감자가 많이 난다고 한다.
: 손재주가 좋아 이것저것 잘 만들고 고친다. 어릴때부터 실내 활동을 주로 하다보니 심심함에 이것저것 배워둔 덕분이다. 꾸준히 하는 소일거리는 옷 수선, 자수놓기이며 절기에 따라 짚단을 엮어 만드는 생활 용품들이나 얇은 나뭇대로 만들 수 있는 공예품을 만들기도 한다. 요리도 그럭저럭 하는 편이지만 먹을만한 끼니를 내놓을 수 있는 정도일뿐 손재주에 비해 그렇게 특출나진 않다.
: 동생이 3명 있다는 말이 거짓은 아닌듯 왈패단 내의 어린 아이들을 잘 돌보고 놀아준다. 동생들은 지금 각각 따로 떨어져 살며 아주 드물게 서신을 주고받는다.
: 좋아하는 것은 고구마 말랭이, 곶감. 가을이면 알게 모르게 살이 조금 올랐다 겨울에 빠진다. 싫어하는 것은 딱히 없으나 신 것은 대체적으로 잘 못먹는 편.
: 어쩐지 세상 다 산것 같은 노인의 말투를 자주 쓴다. 담영 특유의 장난이지만 어쩐지 아무도 장난인 것을 알아주지 않아 설마 하는 마음으로 계속 쓰다보니 입에 붙어버렸다. 평범한 어휘 구사도 가능하다.

[자명] “단단한 등이야. ……그래, 대서에 처음 들어섰을 때 보았던 높고 큰 벽같은.”
시장 거리 골목 작은 수공예 가게에 자리를 잡았을 때엔 이방인 주제에 쉽게 녹아들었다 여겼다. 제 한몫 입에 풀칠하고 살 수 있기만 하면 어떤 일이든 좋다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일이 쉽게 풀렸다. 잘 곳도 먹을 것을 살 돈도 생겼으니 이만큼 좋은 일이 어디 또 있으랴.
담영은 낮이건 밤이건 물건을 늘어놓은 평상 끄트머리에 앉아 무언가를 만든다. 지나가는 이들이 가끔 아는 체 인사를 하면 조금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꾸벅이며 인사를 한다. 말을 붙이는 이가 몇 있었지만 얼굴은 좀처럼 눈에 익지 않아 매번 어물쩍 대꾸를 할 뿐이다.
그러던 어느 날 낯이 조금은 익숙한 이가 통성명을 해왔을 때에는 조금 놀랐다. 이름을 몇 번 입 안에서 굴렸다. 퍽 낯선 이름이었다. 어딘가 같이 가자고 하던가. 볼을 긁적인다. 나쁘지 않은 제안인 탓이었다. 뒤집어 말하면 썩 좋지도 않았다. 어쩔까 고민하던 와중 스치듯 다른 ‘아이들’도 있다는 제안에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들은 좋았던 탓이다.
휘몰아치는 바다와 얕은 개울을 구분하지 못하는 주제에 자주 물가에 있다. 그러니 뺨이 얼어붙기 전에 물가의 찬 바람을 막아줄 이가 하나쯤 있는 것도 나쁘지 않지. 날이 추울 때에는 쉬어갈 수 있으니 감사할 따름이다. 그러나 날이 좋은 날에는 잠깐 바깥에 산책을 다녀와도 되는 게 아닐까? 하는 안일한 생각을 하며 담장 너머의 하늘을 호시탐탐 눈에 담는다. 자명은 어쩐지 그런 저를 탐탁지 않아 하는 것 같지만, 아직까지 이유는 알지 못한다.
“금방 다녀올게. ……혹시 이번에도 내가 잘못된 선택을 한 게니. 알아 들었으니 너무 화내지 말아.”
[무명] “눈이 내리려나 보구나. 응? 나는 무엇이든 알지.”
어느 저녁에 문득 그런 말을 던질 때가 있다. 하늘이 맑은 날이건, 맑지 않은 날이건 눈이 올 것 같다 한 날의 밤에는 꼭 눈이 내렸다. 사냥을 나가는 아이들에게 내일은 옷을 더 단단히 입고 나가야 할 것이라고 조언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눈이 오는 새벽에는 불그림자가 벽에 아른거리는 것을 보다가 모두가 잠들었을 즈음 조용히 나온다. 멀리 가지도 않고 곳간의 가파른 지붕 처마 밑 나무상자에 앉아 눈이 내리는 걸 하염없이 쳐다본다. 틀어진 오른쪽 발을 달달 떨면서, 새벽녘의 창백함을 볼에 물들이고 오래 앉아있다가 눈이 그칠 즈음 들어온다.
무명은 담영의 기묘한 습관을 아는 몇 안되는이다. 어느 새벽에 눈이 좋으냐 물었다가 애매한 웃음과 추위에 얼어붙은 식은땀을 본 후로는 그것이 습관이 아닌 지병이라는 것을 눈치챘다. 흐린 날 진통 효과가 있는 탕약을 내밀자 한다는 말이 ‘혹 네게 사사로운 폐가 된다면 언제든 그만두렴.’ 인 것은 예상외의 매몰찬 반응이었지만. 아무래도 폐가 되는 것이라 여겼던 탓인듯하다.
담영은 아직까지 감사의 인사를 한 적이 없다. 아마도 무명이 저를 위한 탕약을 끓이는 것을 그만둔다면 그제야 ‘고마웠다.’고 말할 셈인듯하다.
[낙랑] “흠……다음에는 저 자가 어떻겠누?”
장작이 타닥타닥 타들어가는 소리 아래로 은밀하고 담담한 목소리가 깔린다. 숙련된 사냥꾼은 사냥감과 눈을 마주하지 않는다. 그늘에 숨어 순간을 노릴 뿐. 정작 담영은 어릴 적 장난으로라도 사냥을 해본 적이 없었다는 것이 퍽 우스운 것 점이기는 하지만 둘이 조용히 모의 작당을 할 때에는 항상 그랬다. 바느질하는 손을 멀뚱히 내려다보던 이가 답한다. 나쁘지 않지.
낙랑이 겨울 산을 헤매다 뺨에 겨울바람 냄새와 옅은 혈향을 묻히고 들어오면, 담영은 그 가죽을 받아들고 차근히 무두질부터 해나갔다. 등불을 켜놓고 잠든 이를 힐끔힐끔 쳐다보며 가죽 옷 한 벌을 다 지어내면 그것을 다시 낙랑에게 건넸다. 네가 잡아 온 것이 아닌고? 공치사는 네 몫이어야지. 그 옷은 다시 어느 밤 조용히 눈길을 주었던 자의 손으로 들어간다. 이들은 그 일을 열두 번 반복할 셈이다.
그럭저럭 좋은 과업의 동반자이기는 하지만 처음부터 평탄했던 것은 아니다. 낙랑이 제일 첫 번째 대상으로 담영을 꼽았기 때문이고, 담영은 그런 낙랑을 멀뚱히 쳐다봤던 탓이다. 사소한 갈등으로 바쁜 여정에 차질이 생길 수는 없었기에 둘은 적당히 타협했다. 그 결과가 낙랑의 토끼털 목도리와 담영의 털 신발이다.
이제 겨울의 시작이다. 위대한 과업은 막 걸음마를 뗐다.